2023년 10월 26일 지휘자 서신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사도바울이 이 서신을 쓰고 있던 당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무엇인가를 부끄러워 하게 되는 것은 그것의 가치를 하찮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이 귀한 것이라면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랑스러워 하겠지요. 우리는 때로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의 가치를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복음은 나의 공로로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고행을 통해 완성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오히려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으로 우리들에게 주어진 너무나도 귀한 것입니다.
저는 부모님을 부끄러워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담임 선생님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집으로 가정방문을 오는 대신에 저와 어머니를 선생님의 댁으로 초청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그 선생님의 집은 우리 집과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그 때 우리 집은 장정 몇 명이 하루 만에 헐고 하루 만에 다시 세울 수 있을 정도로 허름한 ‘하꼬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의 집은 대문에 들어서서 한참 걸어서 들어가야 집이 나올 정도로 컸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원에는 둥글둥글하게 다듬어져있는 정원수들과, 초록색 잔디에 분수대 까지 있었으니 어린 동근이가 보기에 얼마나 신기했겠습니까.
그날 면담을 마치고 나올 때에 저는 저도 모르게 저의 속 마음을 어머니에게 말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엄마, 나 집에 안갈래. 여기서 살래?” 억지로 엄마 손에 이끌려 그 집에서 나왔습니다. 선생님 앞에서 민망해 하시는 어머니의 얼굴을 아직 기억합니다. 선생님의 집과 비교할 수 없었던 우리 집은 그 어린 저의 생각에도 부끄럽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몇 년이 지나 아버님이 조그마한 가구공장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덕택에 큰 부자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여유는 생겼던 것 같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시절에 아침에 등교가 늦어져서 공장에서 사용하는 픽업 트럭을 타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바쁜 아침 시간에 운전을 해주신 것이 참 감사한 일이었지만 사실 저는 키 작은 아버지와 그 픽업트럭이 부끄러웠었습니다. 그래서 학교 정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내려달라고 하고 뛰어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저의 마음 속에 죄책감으로 남아있는 것을 보면 그 때 제가 어렸어도 미안한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소중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아야한다는 교훈으로 남았습니다.
우리들에게 전해진 복된 소식은 결코 오던 길에서 주워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하시려고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물과 피를 흘려 이루어내신 소중한 것입니다. 이 복음을 우리가 필요와 상황에 따라 부인하거나 모른 체 하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되시는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기시는 모든 카리스 찬양대원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양 영상: https://youtu.be/aZaBQJqaCAk?si=-VOD22O0VwYYCw_N
김동근,